시와글 감상/신문 좋은글

가을이 온다

무명화 2017. 1. 19.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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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온다 

박재성(편집부 차장)


격정의 여름 끝자락, 손꼽아 기다렸던 파파를 떠나보내고 가을은 온다. 서로 마음 못 열어준 우리 대화는 독백이 아니었을까 하는 낙심을 이리처럼 깨물고 가을은 온다. 여태 옴짝달싹 못하는 10명이 가슴을 뜨겁게 불 지펴 더운 줄 모르고 가을은 온다. 윗분은 어디서 뭘 했을까, 미스터리 7시간이 미치도록 궁금하고 가을은 온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아이들이 더 그리워질 테고 가을은 온다. 더운 휴가철, 울돌목 회오리가 한바탕 거세게 휘몰아치고 가을은 온다. 카르페 디엠, 하늘나라로 방향키를 잡은 캡틴이 안쓰럽고 가을은 온다.

 

누구라도 연인이 돼 편지를 받아줬으면 할 때 가을은 온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겁고 사랑처럼 달콤한 에스프레소가 혀에 더 감길 때 가을은 온다. 붉디붉은 꽃무릇 사무쳐 선운사로 가고 싶을 때 가을은 온다. 내소사 숲길 사이로 초록이 지쳐 있을 때 가을은 온다. 지리산 구절초 꽃 지면 가을 가겠지, 지레 슬퍼할 때 가을은 온다. 별들이 표나게 줄어 밤하늘이 씨무룩해질 때 가을은 온다. 초저녁 동서남북으로 큰 사각형을 그리는 페가수스가 머리로 떨어질 때 가을은 온다. 남녘바다로 무리 지어 갈 감성돔이 보고 싶을 때 가을은 온다. 잊고 있었던 예초기 날을 갈아야겠구나 싶을 때 가을은 온다. 사과며 배 값이 얼마나 하나 알고 싶을 때 가을은 온다. 호젓한 캠핑을 준비하며 장작을 더 챙겨야겠다 싶을 때 가을은 온다. 졸음에 겨워 맥 못 추던 아파트 관리아저씨가 부지런해질 때 가을은 온다. 놀이터 귀여운 조무래기들 오종종 모여 짓까부는 소리가 높아질 때 가을은 온다.

 

말해봐, 뭘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했니? 폴 베를렌에게 부끄러운 어른으로 늙어간다는 걸 고백해야할 때 가을은 온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의 말이 주억거려질 때 가을은 온다.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안도현의 시가 문득 그리워질 때 가을은 온다. 기러기 일흔세 마리를 헤아리는 시인의 삶이 부러울 때 가을은 온다. 그리고 여기 이렇게 그의 글을 흉내내고 싶을 때 가을은 온다.

 

 

출저:전남일보/서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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