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새는 고대 북유럽 원주민인 켈트족의 전설에
등장한다. 알에서 깨어나 둥지를 떠나는 순간부터 가시나무새는 아무도 가길 꺼리는 가시나무를 찾아다닌다. 여기저기 다니다 가시나무를 발견하면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 가슴을 찔려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간다.
죽어 가면서 부르는 노래가 얼마나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지 온 세상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정도라고 한다. 이 전설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것은 처절한 고통을 치러야 얻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슬픈 전설만큼이나 가시나무새는 작품 속에서도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듀엣 가수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작사하고 직접 부른 ‘가시나무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내 속에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 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가시나무새는 가시나무숲에서
안식을 찾으려 하지만 슬픔으로 메말라 있는 나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며 탄식하고 있다.
가시나무는 가시가 난 나무를 통칭하지만
식물학에서 말하는 진짜 가시나무는 참나무과의 상록활엽수를 가리킨다. 가시나무를 비롯해 붉가시나무·종가시나무·참가시나무·개가시나무 등 다양한데
줄기에는 가시가 없고 종류에 따라 잎에 작은 톱니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가시나무를 가서목이라 하여 소나무처럼
귀하게 여겼다. 정조 18년(1794년) 호남 위유사 서용보가 올린 글을 보면 “가서목은 완도에서만 나는 보물 같은 특산물로 단단하고 질겨
무기로 중요하게 쓰이는데 가죽나무나 상수리나무 같이 땔나무 취급을 받는다”며 ‘소나무 벌채 금지 규례에 따라 낙인을 찍어 관리할 것’을 임금에게
요청했다. 당시 완도에서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우수영(해남)에 숯 20석을 바치고 있었는데 이때 가시나무가 땔감용으로 사용되는 현장을 조사하고
올린 상소다.
완도수목원의 가시나무 숯가마 터가 자치단체 관리 자산 중 처음으로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다. 200여 년이 지나
가시나무가 제 가치를 인정받는 듯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출저:광주일보/무등고/장필수 정치부장